"라면 팔아 빌딩 올렸다"…베트남 부호들의 출발점, 2.1조 라면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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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부호 상당수는 특이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바로 라면으로 추후 사업에 쓸 밑천을 마련한 ‘라면왕’이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베트남 최대 민간 기업인 빈그룹(Vingroup)의 팜 녓 브엉(Pham Nhat Vuong) 회장은 1990년대 우크라이나에서 인스턴트 라면을 대히트시킨 뒤 고국으로 돌아와 리조트 사업을 시작했고, VP은행의 응오 찌 융(Ngo Chi Dung) 이사회 의장 역시 러시아에서 만든 라면 브랜드가 큰 인기를 누리며 막대한 자금을 벌어들였다. 소비재·유통대기업 마산그룹(Masan Group)을 이끌고 있는 응웬 당 꽝(Nguyen Dang Quang) 회장 역시 1990년대 러시아에서 라면 사업으로 성공해 생산 품목을 확대하고, 2000년대 베트남에서 본격적인 식품제조·유통업을 시작했다.
1990년대 소련 붕괴 직후 극심했던 동유럽의 경제적 혼란과 생필품 수급난 속에서 베트남 유학생 출신 사업가들이 피워낸 '라면 신화'는 현재 베트남 시장으로 이식되어, 베트남을 전 세계에서 라면을 가장 많이 먹는 '세계 1위 라면 소비국'으로 탈바꿈시켰다.
세계라면협회(WINA)에 따르면, 베트남은 2024년 기준 연간 81억3,700만 개의 라면을 소비하며 세계 라면 소비량 4위에 올렀다. 1인당 연간 라면 소비량은 약 81개로 집계돼 전 세계 1위를 차지했다. 라면에 진심인 한국(79개)을 제친 것으로, 베트남 국민 1명이 일주일에 1.5개 이상의 라면을 소비하는 셈이다.
현지 증권사인 VN다이렉트증권과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의 데이터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베트남 인스턴트 라면 시장 규모는 15억 달러(약 2조1,460억 원)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또한 이들 기관은 오는 2027년 베트남 라면 시장 규모가 40조 동(약 2조1,800억 원)을 돌파하며 가파른 성장을 지속할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 라면 또한 현지 청년층을 중심으로 소비자를 늘려가고 있다. 젊은이들이 주로 찾는 유통의 최전선, Z세대의 놀이터인 편의점이 유행을 주도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으면서 한국 라면들 역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베트남 전역에 400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 중인 GS25베트남에 따르면, 6월 기준 지난 1년간 전국 매장에서 판매된 봉지라면 상위 20개 제품 중 무려 10개(50%)가 한국 라면으로 채워졌다. 현지 라면 기업들이 가성비 라면으로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는 사이, 편의점을 애용하는 젊은 층 사이에서는 K-매운 라면이 입지를 확대하고 있다.
GS25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라면으로는 에이스쿡의 시우까이(SIU KAY) 해물매콤면이 이름을 올렸다. 해당 제품은 베트남어로 독음이 같은 ‘엄청 맵다(Sieu cay)’라는 제품명으로 에이스쿡이 한국식 매운 라면 열풍에 대응해 출시한 제품이다. 삼양식품의 까르보 불닭볶음면은 2위에 오르며, 한국 라면 전체 1위를 차지했다. 뒤이어 10위권에는 삼양식품의 원조 불닭볶음면(6위)과 치즈 불닭볶음면(8위), 농심 신라면(9위)이 이름을 올렸다. 인도네시아 미고랭(7위, 10위)과 현지 브랜드들을 제외하면, 편의점을 이용하는 현지 청년층의 입맛을 사로잡은 실질적인 주도권은 한국 라면이 쥐고 있는 셈이다.
현지 언론 및 시장 전문가 분석에 따르면, 베트남인들의 유별난 라면 사랑은 베트남 특유의 주거 환경과 생활 방식, 식문화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냄비에 물을 올려 끓여 먹는 방식과 달리, 베트남 봉지라면은 면발이 얇아 대접에 면과 스프를 넣고 끓는 물만 부어 3분 만에 먹는 방식이다. 라면을 끓일 냄비나 별도 조리기구 없이 뜨거운 물만 있으면 뚝딱 한끼를 해결할 수 있어 바쁜 직장인들과 학생들의 손쉬운 식사나 간편한 야식으로 최적화되어 있는 셈이다. 물론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라면을 박스로 구매하는 것이 대중화된 것도 라면 소비량을 끌어올리는 데 한 몫을 했다.
베트남에서 라면은 거주지 인근 마트나 슈퍼마켓 어디서나 쉽게 구매할 수 있고, 라면 가격이 봉지당 4,000~8,000동(220~440원) 수준으로 부담이 없다는 것 또한 라면 소비량이 높은 이유 중 하나다. 저렴한 가격 만큼이나, 베트남 라면은 분말 스프와 별첨 향미유, 라면 등으로 구성이 단조롭다. 이 때문에 현지 소비자들은 라면을 단품으로 먹기보다 계란·소시지·고기·채소·라임즙 등을 곁들여 먹는 경우가 많고, 전골요리류의 면사리로도 광범위하게 소비된다.
실제로, 시장조사기관 인사이트아시아(InsightAsia)가 최근 진행한 한 조사에 따르면, 베트남 소비자가 라면 한 그릇을 먹을 때 지출하는 평균 비용은 1만8,400동(약 1,000원)으로 집계됐다. 라면 한 봉지를 사는 데 8,000동을 지출하고, 나머지는 달걀, 소시지, 고기, 채소, 해산물 등 추가하는 토핑 재료로 지출됐다. 라면 가격보다 부재료에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는 셈인데, 이는 라면을 하나의 요리로 인식하고 소비하고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유로모니터가 집계한 베트남 면류 보고서를 보면, 현지 라면 시장은 에이스쿡과 마산그룹, 아시아푸드, 유니벤 등 4개 대형 제조사가 전체의 80% 이상을 틀어쥐고 있는 전형적인 과점 체제다.
이처럼 현지 기업들이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지만, 한국 라면은 '프리미엄'과 '매운맛', 그리고 'K-콘텐츠'라는 확실한 무기를 앞세워 독자적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수치상으로는 불닭볶음면의 삼양식품이 1.5%의 점유율로 한국 기업 중 선두를 달리고 있으며, 팔도(1.4%)와 농심(0.9%)이 그 뒤를 바짝 쫓는 모양새다.
점유율 자체는 적어 보이지만 내실은 탄탄하다. 한국산 라면은 현지 일반 라면보다 1.5~3배가량 비싼 프리미엄축에 속하나, K-컬처에 친숙한 도심 중산층과 MZ세대를 중심으로 소비층을 늘려가고 있다. 여기에 최근 '케이팝데몬헌터스(케데헌)'와 같은 글로벌 K-콘텐츠 흥행이 이어지면서, 한국 라면을 일상의 문화 상품으로 소비하는 흐름도 관측된다.
현재 국내 라면 4사 중 오뚜기와 팔도가 베트남에 생산공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농심은 판매법인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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