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듯 떠나온 여행, 하장에서 받은 작은 위로[이영민의 지구방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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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kmib.co
55ℓ 배낭에 패배감 담고 떠난 첫 여행지서 뜻밖의 온기 “아이 원트… 바이… 기프트.” 녹이 베트남 북부 동반의 올드타운 광장 기념품 가게에서 팔찌를 건네며 서툰 영어로 말했다. 선물하려고 샀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녹은 내가 베트남 하장 루프 여행에서 만난 ‘이지라이더’다. 이지라이더란 오토바이 운전이 미숙한 여행자를 뒤에 태우고 여행하는 운전자 겸 가이드다.
하장 루프는 베트남 최북단 산악지대를 순환하는 약 350㎞ 길이의 도로다.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웅장한 석회암 봉우리나 협곡, 소수민족의 생활 터전인 산비탈 계단식 논 등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동반 카르스트 고원과 청록빛 노퀘강이 흐르는 마피렝 고개가 하장 루프에서 손꼽히는 장관이다. 굽이치는 도로를 따라 고개를 넘거나 산을 돌아갈 때마다 색다른 풍경을 볼 수 있어 전 세계 많은 오토바이 여행자가 이곳을 찾는다. 우리는 하장에서 출발해 소수민족 몽(베트남어로는 흐멍)족이 많이 사는 동반, 마피렝 고개와 노퀘강, 거대한 베트남 국기가 있는 중국 접경지대 룽꾸 등을 여행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한 것도, 이렇게 오래 탄 것도 내 삶에서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산길을 오토바이로 달리는 것이 과연 안전할지, 힘들지는 않을지 적잖이 걱정이 됐다. 게다가 나와 같은 투어를 예약했던 사람들이 일정을 바꿔 이번 참가자는 나 혼자라고 했다. 그런데 출발 당일 아침 8시 숙소로 나를 데리러 온 이지라이더가 고등학생처럼 앳된 청년이라니. 불안한 마음이 커졌다. 게다가 안개가 많아 시야가 탁하고 봄의 신록도 아직 올라오지 않아서 하장을 찾는 여행자가 적은 시기라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기우였다. 하장 시내를 벗어나 산악지대로 접어들자 아름다운 하장의 풍경이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은 나를 향해 몰려왔다. 연기인지 안개인지 뿌연 장막을 두른 산세는 답답하기보다는 오히려 신비로웠다. 봄 햇살이 떨어진 능선에는 식물의 초록빛과 바위의 검은 빛이 절묘한 조화를 이뤄 연신 감탄사를 터트리게 했다. 주행 내내 머릿속까지 씻어낼 듯 시원한 공기를 만나다 간간이 마른 풀을 태우는 냄새나 갓 일구어 놓은 흙냄새가 코를 스칠 때는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고개 정상의 ‘관바 천국의 문’과 회색빛 석회암 지대 ‘문 스톤’으로 향하는 굽이굽이 산길에서는 마치 바람이 된 듯 몸이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험준한 마피렝 고개를 내려가 노퀘강을 떠가는 보트 위에 섰을 때는, 강 저편 협곡에 전설 같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에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오토바이는 엉덩이가 아파올 때쯤이면 멈춰서 풍경을 볼 시간을 줬다. 녹은 서툰 영어나 번역기를 활용해 열심히 풍경을 설명해 주었고, 매번 카메라 앞에 나를 세워 기념사진을 찍어주었다. 식사는 모두 현지식이었는데, 녹은 매번 수저를 챙겨주고 물을 따라주었다. 마지막 날에는 제법 친해진 덕분인지 부끄러움도 잊은 채 산속 카페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이런 서비스까지 투어 비용에 포함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과분할 정도로 대접받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만난 지난 3월 기준, 녹은 만 열아홉 살이었다. 하지만 이미 고등학교 때 만난 1살 연하의 아내와 돌이 지난 딸을 둔 가장이었다. 한 달에 많게는 6차례 정도, 2박3일이나 3박4일 일정으로 집을 비운다고 했다. 앳된 그에게 아내와 딸이 있다는 사실은 하장 시내를 벗어나 처음 도착한 산속 카페에서 알게 되었다. 그의 아내는 일을 나간 남편에게 어린 딸의 영상을 수시로 보내왔다. 녹은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세울 때마다 절대 커피나 군것질은 하지 않고, 딸의 재롱 영상을 보며 피로를 풀었다.
이런 알뜰한 가장, 녹이 투어 마지막 날 밤 내게 현지 주민들이 만들어 파는 팔찌를 선물한 것이다. 기침하는 녹에게 내가 나눠준 기침약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액세서리에 관심이 없는 나지만 그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여행지까지 나를 따라온 귀찮음과 짜증으로 얼룩진 마음이 타지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작은 온기를 만나 한결 풀리는 듯했다.
누구나 살다 보면 별 문제 없이 길을 걷다가 갑자기 눈앞의 횡단보도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뀐 것 같은 순간을 만난다. 평소 하던 대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
내게도 그런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대학원 공부를 그만두고 취업을 준비해야 했을 때,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 적응의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가 그랬다. 애정을 쏟았던 또 다른 직장이 하루아침에 폐업해 졸지에 실업급여를 받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2026년 3월 12일자 베트남 호치민 항공권을 결제할 당시의 내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내가 주변에 2~3년 계획으로 세계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대부분의 반응은 “좋겠다” 혹은 “부럽다”였다. 만 47세라는 나이를 고려해 “괜찮겠어?”라며 걱정하거나, “여행 경비는 얼마나 드는데?”하고 계산기를 두드려주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난 지금 너무 괴로워서 도망가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나는 살면서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용기 있게 맞서지 못했다. 회피하거나 그저 이 수렁에서 건져줄 누군가를 기다렸다. 하지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오지 않는 구원자를 기다리기만 하는 삶은 불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고, ‘또다시 패배했다’는 착잡함까지 55ℓ 배낭에 담아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뜻밖에도 첫 국가에서 한 청년을 만났고, 그로부터 작은 위로를 받았다. 우리는 살아온 세월도 환경도 언어도 다르고, 서로의 사정도 모른다. 하지만 서로를 위해 작은 진심을 나누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음이 가는 대로 하면 될 뿐이다.
이 여행기를 쓰기 위해 소셜미디어에 올렸던 사진을 뒤적이는데, 녹으로 보이는 계정이 추천 화면에 등장했다. 반가운 마음을 베트남어로 번역해 녹에게 보냈다. “I’m happy to hear that! We’ll follow each other(소식 들어 반가워요. 우리 서로 ‘팔로우’해요)”라는 답장이 웃음 이모티콘과 함께 왔다. 헤어질 때 “영어를 공부해서 나중에 다시 만나면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이영민 자유기고가 서울대 국어국문학·정치학과 졸업·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공채 취재기자를 시작으로 빅이슈 편집부국장, 아프리카TV 홍보팀장·콘텐츠크리에이션팀장, 국경없는기자회 한국 특파원, 기후미디어허브 커뮤니케이션 담당 등을 거쳤다. 외국계 스타트업 육성·투자회사에서 투자연구원으로도 일했다. 2026년 3월부터 세계를 여행 중이다.
동반(베트남)=글·사진 이영민 자유기고가 많이 본 기사 정치 경제 사회 국제 엔터 라이프 TOP50 해당분야별 기사 더보기 ‘무보수 논란’ 박진영 “받는 줄 몰랐다. 당장 반납하고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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